[5화: 흔들리는 마음] 다음 날 아침. 지유는 무거운 책가방보다 더 무거운 마음을 끌어안고 학교에 들어섰다. 복도는 평소보다 더 시끄러웠다. 익숙한 시선들. 낄낄대는 웃음소리. 그리고— “화장실은… 미리미리 가야 하는 거 몰랐나 봐~” 박동수였다. 그 옆엔 늘 붙어 다니는 무리들. 대놓고 웃지는 않지만, 눈빛에 다 드러나 있었다. 지유는 아무 말 없이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손끝이 덜덜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닥치고 꺼져.” 유나. 지유의 친구이자, 이럴 땐 누구보다 직설적인 아이. 박동수는 움찔했다. “뭐, 뭐야 얘… 왜 이렇게 예민해… 농담도 못 하냐…” “그딴 농담, 네 수준에선 유머야? 그냥 무례지.” 유나의 눈빛은 날이 서 있었고, 박동수 무리는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흩어졌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유나의 소매를 잡았다. “…고마워.” “별말을 다 해. 애초에 쟤네가 이상한 거잖아.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두 명의 여학생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유진과 주현서. 유진은 팔짱을 낀 채, 비꼬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아, 진짜 한심하다. 지렸으면 뭐라도 해야지. 징징대기만 하고…” 현서는 말없이 유진을 쳐다봤다. 입술을 앙다문 표정. 눈빛은 뭔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쉬는 시간. 지유는 조용히 복도를 지나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그저 조용히… 그저 아무 일 없이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야.” 익숙한 목소리.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김유진. 지유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유진이 한 걸음 다가왔다. “너 또 지릴까 봐 화장실 가냐?” 그 말에, 지유의 가슴속 어딘가가 ‘딱’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생각보다 훨씬 더 큰 힘으로 지유는 유진의 어깨를 밀쳤다. “그만 좀 해!” 유진도 바로 반응했다.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우, 왜 이래 진짜. 미친 거 아냐?” 그리고 똑같이 지유를 밀쳤다. 두 사람의 어깨가 부딪히고, 긴장감이 번개처럼 번졌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학생들 몇 명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누가 먼저 손을 올릴까. 누가 먼저 폭발할까. 그때, 누군가 두 사람 사이로 들어왔다. 주현서.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이 정도에서 그만하지?” 두 사람 모두, 그 말에 일순 멈췄다. “진짜 싸우고 싶은 거면, 교무실 앞에서 하던가. 여기서 더 하면 그냥… 재미없어져.” 유진은 비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흥. 웃긴다 진짜.” 그러곤 복도를 빠져나갔다. 지유는 가만히 서 있었다. 심장은 계속 뛰었고,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현서는 그런 지유를 한번 쓱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 아무 말 없이 뒤따라갔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지유 혼자,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점심시간. 급식실은 평소처럼 북적였지만, 주현서의 걸음은 분명한 목적을 향하고 있었다. 박동수 무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잠깐.” 박동수는 고개를 들었다. 입엔 아직 김말이가 한가득. “어, 현서야. 뭐야, 우리 테이블에 앉게?” 현서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박동수를 내려다봤다. “재미로 애 하나 망가뜨리는 거, 별로 안 멋있는데?” 순간 테이블 분위기가 싸해졌다. 박동수는 껄껄 웃으며 젓가락을 내려놨다. “와, 뭐야. 너 우리랑 친한 줄 알았더니 이지유 감싸네? 갑자기 정의의 사도라도 된 거야?” 현서는 가볍게 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그냥, 보기 싫어서.” 그 짧은 말에 담긴 냉정함. 그 말에 테이블 위 공기가 얼어붙었다. 현서는 더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 등 뒤에서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장면을 누군가가 복도 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김유진. 식판을 들고 막 급식실로 들어가던 참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춘 채, 그 장면을 지켜봤다. 현서가… 박동수한테? '왜 저래…?'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자기 편이었던 사람. 말은 없어도 늘 자신의 분위기에 동조하던 아이. 그 애가… 지유 편에 서다니. 5교시 시작 전, 교실 안은 미묘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다들 느끼고 있었다. 주현서와 김유진 사이. 뭔가, 달라졌다. 유진은 가만히 현서를 바라보다, 책상을 강하게 정리하며 조용히 말했다. “재미있네, 진짜.” 현서는 유진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있는 애들은 다 알았다. 이건, 시작이었다. 무너지는 균형, 그리고 새로 만들어질 흐름의 조짐. [6화: 변화의 시작] 체육관 복도 끝, 딱딱한 발소리가 울렸다. 지유는 조용히 가방을 들고 교실로 향하려는 참이었다. 그러다, 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툭.” 가방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지유도 중심을 잃고 앞으로 비틀거렸다.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박동수가 웃고 있었다. “아이고 정말 미안~ 발에 걸렸나보다?” 그 말투엔 미안함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지유는 이를 악물고 가방을 주우며 말했다. “진짜 왜 이러는데.”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박동수는 비웃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나 조심하지 그랬어. 생리현상 하나 못 다루는 지.유.야?” 몇몇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지나갔다. 그 순간— “그만해, 박동수.” 무겁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돌아본 쪽에, 김유진이 서 있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박동수의 멱살을 붙잡았다. “진짜 찌질하게 구네, 박동수?” 그녀의 손엔 망설임이 없었고, 눈빛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박동수가 당황해 뒷걸음질쳤다. “뭐, 뭐야 갑자기… 너 나랑 같은 편 아니었냐?” 유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지유를 향해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그 눈빛. 예전과는 분명히 달랐다. 예전엔 무관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던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쳐갔다. 측은함? 이해? 아니면— 미안함? 박동수 무리도 분위기를 감지했다. 눈빛이 변한 김유진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누군가 작게 속삭였다. “쟤, 왜 저래… 김유진이 왜 갑자기 쟤 편을 들어?” 지유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봤다.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자신을 지켜준 건 예상 밖의 사람. 지유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보건실이었다. 옆엔 박동수를 뺀 모두가 걱정하고 있었다. 묘하게 뒤틀려가던 관계의 선들이, 그날부터 조금씩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7화: 비밀에 가까운 그 눈빛] 늦은 오후. 교실에 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창가에 앉은 지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너머로 빛이 들어오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자리, 어느샌가 조용히 앉은 주현서. “너, 요즘 괜찮아?”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담담했다. 지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덕분에.” 잠시 정적. 지유는 생각했다. ‘현서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애는 아니었는데…’ 그런데 그때, 그가 문득 말했다. “근데— 넌 왜 하필 고양이로 변하는 걸까?” … … 지유의 숨이 딱 멈췄다. “……뭐라고?”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금 뭐라 그랬어? 고양이로… 변한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현서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냥, 무심한 듯. 아주 평온한 얼굴. 하지만… 눈빛만큼은 달랐다. 마치,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너… 지금 뭐라고 한거야..?” 지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냥. 그런 상상도 해봤다고. 만약 사람이 동물로 변한다면, 넌 아마 고양이일 것 같다고.” 그 말에 지유는 묘하게 안도하면서도, 완전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건 그냥 우연일까? 아니면 진짜로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순간, 현서는 그녀를 다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고양이는… 겁이 많지만, 진짜로 도망치진 않더라. 숨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니까.” 지유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자신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아니, 분명히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그의 말투는 따뜻했지만, 그 안엔 분명 무언가 숨겨진 메시지가 있었다. 지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단순히 관찰력이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그날 초인종이 울리던 순간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인지.
[8화: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 체육대회 이후, 지유는 학교 안에서 되도록 눈에 띄지 않으려 했다.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만 지내면…’ 하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누군가에게 낙서 한 줄을 남기기엔 너무 좁고, 소문 하나를 묻기엔 너무 시끄러웠다. 쉬는 시간. 지유는 사람들 시선을 피해 복도 끝 창가 옆에 섰다.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얼굴을 적셨고, 그 빛 속에서만큼은 자신이 투명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혼자 있는 거, 이제 익숙해졌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유의 눈이 번쩍 떠졌다. 고개를 돌리자, 주현서가 서 있었다. 언제 다가온 건지, 소리도 없이. 항상 그렇듯, 그는 조용했다. “…놀랐잖아.” 지유는 애써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심장이 벌써 요동쳤다. 현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익숙하다는 듯 지유 옆 벽에 기대었다. “미안. 근데 너, 요즘 자주 여기 있더라. 이 자리가 마음에 들어?” “그냥… 조용해서.” 지유는 짧게 답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아도, 뭔가 속을 들킨 느낌이었다. 잠시 정적. 복도엔 둘뿐이었다. 그 순간— 주현서가 입을 열었다. “고양이로 변하는 건,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거야?” …… 순간, 공기가 멎은 듯했다. 지유는 숨을 멈춘 채, 그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뭐라고?” “응?” 현서는 아무렇지 않게 되묻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상상해봤어. 만약 사람이 고양이로 변한다면, 기분이 큰 영향을 줄 것 같잖아.” 지유의 손끝이 떨렸다. 방금 그 말… 그냥 농담이었을까? “진짜 상상으로 한 말이야?” 지유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물었다. 그녀 안의 두려움은 이미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현서는 지유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난 많은 걸 보고 있어.” … 그 말은,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농담이 아니었다. 지유는 숨이 턱 막힌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현서는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뒷짐을 지며 말했다. “근데, 걱정하지 마. 나… 그런 거 함부로 떠벌리는 성격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평범했지만— 지유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떻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질문도 하지 않던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드러냈다. 지유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제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박도현? 라임쌤? 아니면… 주현서? 그날 밤, 지유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창밖엔 고요한 달빛이 내렸지만, 지유의 심장은 온갖 생각으로 사방팔방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