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다시 에빌덤 스쿨. 웅성거리는 사람들 가운데, 판사가 천천히 판사석에 섰다. 깊고 날카로운 눈매와 저울과 닮은 모습을 가진 판사였다. 어떠한 문제도 정확히 저울 재듯 판결할 것 같은.. 그런 그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고, "지금부터 징계위원회를 개정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그의 엄숙한 목소리가 울리는 동안, 차현은 무심코 다리를 꽉 쥐었다. "그러면... 우선 사건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2학년 학생 차현 군이 금일 11시 43분 경, 지하 1층의 교직원 외 출입금지 구역에 그려져 있던 흑마법 마법진 근처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되어 금지구역 출입, 흑마법 시행 등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징계위원회에서는 그 혐의에 대한 진위여부를 가리고 그에 맞는 징계를 내릴 것입니다." 흑마법이라는 말에 회장 전체에 긴장감이 돌았다. 흑마법, 말 그대로 어둠의 마법이다. 당연히 중죄 중에서도 형량이 매우 높은 편에 속한다. 즉 차현이 흑마법을 시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최대, 퇴학까지 고려되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차현은 바로 눈앞에 직면해온 현실에, 잠시 머리가 하얘졌다.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 떨리는 걸 느끼지 못했다면 아마 기절해버렸을 것이다. 차현은 곧 그게 세피로스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우선, 현장 최초 목격자를 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메디오 씨." "아, 예.." 증인으로 나온 인물은 평범하디 평범해보이는 한 교직원. 딱히 흑마법을 시행할 지식도 대담함도 없어보였다. "증인, 목격한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러니까 그그.. 그래, 대략 11시 38분쯤에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 뭡니까. 뭐랄까..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소리였어요. 어쨌거나 참 이상하다고 느끼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는데, 글쎄 저 피고 친구하고 마법진이 같이 있지 뭡니까.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다른 교직원분들께 알렸습니다." "목격한 것은 그게 전부입니까?" "예. 근데 저 친구가 정말 범인인가 의심이 되는데.." "판단은 판사가 합니다. 증언이 끝나셨다면 증인석에서 내려가주십시오." "아, 예.." "자 그럼, 피고인에 대해 더 증인 없으신지.." "제가 증인입니다!" 은우였다. 큰 목소리로 외친 은우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고, 판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목을 가다듬고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시죠?" "은우! 2학년입니다!" "..그렇군요. 증언하실 것은?" "피고가 무죄라는 주장입니다!" 그 발언에 방청객들이 술렁였다. '무죄? 방금 무죄라고 했지?' '무죄라니 무슨 자신감으로..' '대체 뭔 소리인지..' "정숙! 정숙! 증인. 그 말 진심입니까?" "진심입니다!!" "그럼 증언해 보십시오. 어떤 근거로 피고가 무죄라고 증언하는 겁니까?" "우선 방금 피고가 의식이 없는 채로 발견되었다고 했죠? 그렇다면 어떻게 마법진을 그리고 그걸 발동했겠습니까? 의식이 없는 상태인데!" "잠깐 증인. 그건.." "그리고 두 번째! 지금 피고가 금지 구역에 들어갔단 증거는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것 자체가 저 목격자의 자작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나나나나나, 나라고??" 은우의 발언에 방청객들 전원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얼떨결에 흑막으로 몰린 메디오 씨는 빼고. '그렇네. 의식이 없는데..' '혹시 정말로 저 목격자 아저씨가..?' "저저, 전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코 아니에요!!" "진정하십시오, 증인. 저 친구가 흥미로운 말을 하긴 했다만, 이미 그게 아니라는 증거들이 가득하거든요." 판사의 말에 은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 첫 번째 주장. 흑마법은 시간과 체력을 엄청나게 소모하는 마법입니다. 마력과 체력이 별개라곤 하지만 성인 남성도 버티기 힘든데, 학생이 뻗어 버리는 건 이해가 충분히 가는 대목입니다." "이, 이런.." "그리고 두 번째. 증거가 없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지금 막 제출할 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진이 있거든요." 판사가 사진을 꺼내들어 모두에게 내보였다. 정말로, 차현이 그 금지구역으로 들어가는 사진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어떻습니까? 더 주장할 내용 있으십니까?" "그.... 아! 기절한 것은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그 사진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정말 온갖 주장을 꺼내시는군요, 증인." 은우와 판사가 말싸움을 벌이는 동안, 차현은 세피로스를 멍하니 쳐다보다 무언가 깨달았다. 이걸 줬던 아리아가 문득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증인, 에빌덤 스쿨의 cctv는 매우 강력한 보안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작은 둘째치고 데이터에 접근 자체가.." 차현은 미세하게 손을 떨기 시작했다. 만약 아리아가 위험에 처했으면? 혹시 죽기라도 했다면? 차현은 그렇게 자문자답을 거듭하다, 마침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건... "애초에! 그런 수준의 마법이면! 제 친구가 흑마법을 하는 게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증인, 혹시 피고의 마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 "피고인의 정보를 조회하던 도중에, 비스킷 교장님께서 직접 쓰신 글귀 하나가 있더군요. '마력이 매우 뛰어난 학생. 주시할 필요가 있다'... 라고 말입니다. 지금 보니 주시할 필요는 확실히 있었군요." "마력 뛰어난 거랑 제 친구 몰린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증인. 흑마법이 창시된 계기를 알고 있습니까? 신원 불명의 한 소년이, 어느 날 마을에서 뛰쳐나가 한 숲에 숨어들어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도 매우 높은 수준의 마력을 가지고 있었죠.. 정체를 숨기려고 초록빛 탈을 썼다나 뭐라나. 뭐 좌우지간.." 차현은 이제 자신이 생각한 최악의 결론을, 거의 확신 중이었다. "그 소년이 그랬듯 피고도 그렇습니다. 자, 이제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이렇게나 증거가 많은데." 이제 장내 분위기는 다시 기울었다. '이제 보니까 저 친구가 맞네.' '안타깝다. 저 나이에..' '쯧쯧.' 이제 은우도 힘든 모양이었다. "차현아! 뭐라 좀 해봐! 난 너 믿어! 넌 그럴 놈 아니잖아! 차현... 아...?" 차현은 울고 있었다. 조용히. "...은우야." 차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믿어줘서 고마워. 정말로.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내가 한 게 맞는 거 같아." "x발, 그게 뭔 개소리야!! 너 기억 안난다면서!!" "내가 안 했다고 해도, 이건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야." "...!" "고맙다. 변호해 줘서." 차현은 다시 고개를 떨궜다. 이제 끝났다. 영원히. "....이야기는 끝났나 보군요. 그럼, 이제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판사가 법봉을 집었다. "선고한다. 피고 차현은 금지된 마법인 흑마법을 시행하여 교내 교직원들의 공포감을 조성하고 교칙 제 38조를 위반하였는 바. 이에 대해 발생한 여러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 피고에게 퇴학 형을 선고..." 쾅-!! "이의.. 허억- 있습니다!! 허억."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다름 아닌 아르키. "....뭡니까, 아르키 선생. 판결은 끝났습니다. 지금 와서 이의를 제기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요." "판결을.. 허억- 뒤집을 정도로- 강력한 증거를, 허억- 가져왔으니 그렇죠, 허억-" "..일단 숨부터 고르시죠." 한참을 헉헉대던 아르키는 간신히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그 '판결을 뒤집을 강력한 증거'가 뭐죠?"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아니마풀러션' 마법이 관측됐습니다." 정적이 흐르고ㅡ ".....방금 제가 잘못 들었습니까?"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왜, 한번 더 말해드릴까요?" 아르키가 능청스레 답했다. 그리고, 장내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뭐라고ㅡ!?' '아니마풀러션 마법이... 관측됐다니...' '그게 왜...!' "정숙! 정숙!!" 판사가 마지못해 진정시키긴 했으나, 아수라장이 되는 건 무리도 아니었다. 아르키가 말한 '아니마풀러션 마법'이란ㅡ 마법을 걸 대상의 이름과 대상의 일부, 말하자면 머리카락이나 손톱 같은 것만 가지고 있다면 그 일부를 사용해서 대상을 자유로이 조종할 수 있는 마법. 심지어 대상은 자신이 조종당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위험한 마법이라 철저히 제한되어 사용되는 마법이다. 아무튼, 아르키가 다시 입을 열고 판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판사님, 혹시 못 믿으시겠다면 지하실의 마법 측정기 기록을 한번 보십시오. 전 거기서 찾았으니까요. 뭐 어쨌거나, 판사님.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연히 차현이가 지하실로 들어가고, 우연히 거기서 흑마법 흔적과 함께 기절하고, 우연히 거기서 아니마풀러션이 관측되고... 이렇게 되면 우연이 아니지 않을까요?"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간단하죠. 전 차현이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해서 흑마법 누명을 뒤집어쓴 것 같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겁니다." 장내는 일순간 다시 고요해졌다. 그 틈을 타 아르키는 차현과 은우에게 눈을 한번 찡긋해주고,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차현의 마음 속에 희망이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혹시 제 말이 억지 주장이라 생각하시는 분 있나요ㅡ? 있으시다면 그거야말로 억지라고 알아주시죠. 자, 징계위원회가 그토록 좋아하는 확실한 증거, 말빨 좋은 증인, 그리고 미남 선생님 한명이 있네요. 완벽하지 않아요?" 진지한 분위기였지만 차현은 한순간 피식 웃었다. "미남 얘기는 농담이에요. 자 그래서, 재판결은 뭐죠? 참 궁금하네요 그래." 판사는 난감한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ㅡ [TO BE CONTINUED]
소..솔직히 이정도면 망한 소설은 아니라 생각해요.. +마법들의 이름은 라틴어를 적당히 변형해서 만들고 있답니다. 바빠서 이번화는 썸네일 없습니다. 되는대로 만들 예정입니다. 본편에서 설명 못할것 같아서 쓰는 아니마풀러션의 세부 설정: 대상의 일부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일부를 불속에 넣어 불태우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그 다음에 조종할 수 있다.) 대상이 조종 중에 기절하면 마법은 풀린다. 대상의 일부가 없거나 이미 사용한 것만으로는 이 마법을 절대 시행할 수 없다. (이것들은 본편에선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 생각하고 봐주시기 바랍니다.)